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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교직원 신문/교단에서(2011.12. 12)
이름: 서정애


등록일: 2011-12-14 10:19
조회수: 2025 / 추천수: 241


[교단에서] 형준이를 바꾼 칭찬 2011-12-12

‘나는 심심할 때 약수터에 간다. 그런데 나는 딱따구리를 봤다. 딱따구리 소리는 좀 그렇지만 나는 쉼터에서 가끔씩 낮잠을 잔다. 자면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듣고 자면 꿈을 꾼다. 깨니 배가 고파서 집에 갈 때가 있었다.’ (하략)

글쓰기 시간에 우리 반 형준이가(가명) 발표한 글이다.  형준이는우리 반에서 학력이 제일 뒤떨어지고 분노조절을 못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만 골라서 하던 아이다. 그것도 어떻게 하면 가장 기분나빠할 말을 해줄까 고심해서 고른 듯 4학년 아이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 대부분이다.

인터넷 중독에 빠진 적이 있다는 형준이는 급우들 앞에서 야동 이야기를 서슴없이 했다. 준비물은 아예 챙겨오지 않고 가방은 항상 뒤죽박죽이며 나머지 공부하다가도 도망치기 일쑤였다. 야단치는 교사에게 경찰서에 ‘폭력교사’로 신고한다며 마구 날뛰면서 대들던 일 등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우리 반 전체에게 스스로 따돌림을 자청하듯 아이들이 싫어할 못된 짓만 골라서 하며 끊임없이 나를 힘들게 하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4교시 과학 전담 수업 시간, 수업 태도 때문에 벌을 서던 형준이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점심도 거른 채 찾아 다녔지만 허사였다. 불안감을 억누르며 마지막으로, 혹시 집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형준이 집을 아는 아이와 함께 나섰다.

허름한 슬래브 집은 황량했다. 수돗가에 핀 분홍색 송엽국이 오히려 집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약간 기울어진 낡은 아래채가 형준이 식구가 세 들어 사는 방이라고 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는 깜깜해서야 오는 엄마를 기다렸구나.’

폭력적인 아빠와 늦둥이라고 감싸기만 하는 엄마, 아빠의 폭력 때문에 가출해서 소식 없는 큰누나. 시골집 단칸 셋방에서 밤늦게 귀가하는 부모를 기다리며 혼자 놀고 혼자 먹다가 혼자 잠드는데 익숙한 아이. 만나기만 하면 아주 단단히 혼내 줄 것이라는 마음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아이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

방안에 미미한 인기척이 있는데 아무리 부르고 전화를 해도 응답이 없었다. 바깥의 우리들 동정을 살피는 아이의 조마조마해하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아이의 소재를 확인했으니 한 시름 놓았다. 더 이상 아이를 불안에 떨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되돌아왔다.

이튿날,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냐고 묻자 문을 열면 혼날까봐 두려워서라고 했다. 가슴이 아렸다.

얼마 전부터 형준이는 나에게 모래놀이 치료를 받고 있다. 짐작대로 형준이는 유아기에 부모애착 불안으로 인한 심리적 박탈 현상이 드러났다. 작은 모래상자에 억압된 분노를 분출하며 좋아지다가 다시 원 상태로 되돌아가곤 하였다.

그러던 차에 형준이가 글쓰기 시간에 쓴 예의 그 글은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아이의 마음 한 켠에 그렇게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니….  

흔히 칭찬은 심리적인 쿠션이라고 한다. 그 쿠션에 힘을 입은 형준이는 자존감이 움틀 것이고 그러면 그간 엉켰던 부적응 행동이 잘 풀릴 것이다.
긴 교직생활을 되돌아보니 그동안 나는 누구의 것보다 견고한 프로쿠르테스의 침대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처지나 성격을 가늠하지 않고 내 나름대로 틀을 정해놓고 판단하기 일쑤였다.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프로쿠르테스 침대를 과감하게 내던지고 내 키를 낮추어 아이의 키에 맞추며 아이의 눈높이에서 칭찬을 해주어야겠다.

나의 칭찬은 아이들 내면 깊숙이 있는 장점과 잠재력을 표면으로 퍼 올릴 수 있는 두레박이 될 것이다. 그들이 올곧게 성장하도록 열심히 두레박질 하는 것은 교사인 나의 몫이다.  

‘형준아, 네 마음에 쌓여 있던 나쁜 감정을 다 쏟아낸 자리 희망의 새 살이 차오르길 바란다. 너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어.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소중한 인격체란다. 다시는 어둠속으로 내려가지 말고 꿋꿋하게 설 수 있는 자신감을 기르길 바란다. 힘을 내자.’

나의 모래놀이 치료가 아이의 맑은 영혼을 위한 따뜻한 밑불이 되길 바란다.  

서정애 경북 경주 모아초 교사

12월 12일자 교직원 신문/독자광장 '교단에서'란에 게재된 글입니다.
분량이 길어 일방적으로 내용을 줄였다는 통보가 와서 걱정이었는데
원문 내용에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네요.


모래놀이 치료를 하면서 마음 아파했던, 6학년이 된 형준이 얼굴이 떠오릅니다.
본교에 내려가면 자주 보는데 변성기가 오고,
몹시 수줍음을 타는 아이로 바뀌었더군요.

교단에세이는 앞으로도 주욱 모아볼 생각입니다.
훗날 퇴직하고 보면 뜻깊은 자료가 될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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