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 있는 마을고샅길을 담고 싶다고 했더니 '산내 태종마을'을 얘기하신다.
선배의 고향, 그곳에서 다시 뿌리 내리고 싶었으나 턱없이 높은 땅값으로 접었다는 곳.
네비게이션에 잡히지 않아 들은대로 어림잡아 간다.
필이 꽂혔던지 폐교된 대현초등앞 작은 수퍼에서 길을 물으니 마침 그집 옆으로 난 길을
안내한다.
먼지 뒤집어쓴 과자봉지 두어 줄과 음료수 몇 병이 고작인 그 점방이 정겨운 것은
80년대 초반 내가 그곳에 살던 시절의 점방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태종마을은 이조삼대왕(芳遠)이 고려 유신들의 군을 전멸하고 태종왕의 이름을 따서 태종이 라 불렸다고 한다.
오후햇살 받은 냇가의 얼음이 찬란하여 두어시간 몰아에 빠진다.
금세 내려앉은 산그렁지(산그림자)에 놀라 쫓기듯 나와 목적지인 '태종'마을 찾아 올라간다.
이정표를 보니 태종을 소호라고도 부르나 보다.
왼쪽 비탈길엔 수려한 전원주택이 즐비하고 오른쪽엔 팬션 민박집 음식점이 즐비한 게
신도시 같다. 다만 '태종잿골길'이라는 이정표만 옛마을을 짐작하게 할 뿐.
어느 산자락의 뾰족지붕마을은 스위스 마을풍경을 연상하게 한다.
돌담길 마을은 옛말, 계곡만은 그대로인듯 수려하다.
풋풋한 이십대 초반 4년을 보낸 산내 의곡초등학교는 첫발령지,
제2의 고향으로 간직되어 가끔씩 들러 운동장과 교사를 둘러보며 향수를 달래곤 하던 곳.
이른 봄날, 연보라색 투피스에 단발머리 갓부임한 여교사는 아직 학생티를 벗질 못했다.
큰 맘 먹고 백화점에서 부임복으로 샀던 그 옷은 엄마와의 마지막 쇼핑이었을 것이다.
그후 훨훨 엄마품을 날아와 버렸으니까.
분홍빛 화사한 꽃이불과 샛노란색 커텐, 당시 유행하던 비키니옷장등 자취살림 가지고
한 번 더 오셨던 엄마는 당시 마흔 세 살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새색시 였던 엄마, 막 사회로 내보낸 첫딸이 얼마나 못미더우셨을까.
먼지 잔뜩 뒤집어 쓴 색바랜 완행버스는 구비구비 돌아 재를 오르며 학질걸린 것처럼
요동을 쳤다. 쏠리지 않으려 손잡이를 힘껏 잡고 있어도 수시로 몸은 불쑥불쑥 튀어오른다.
그해 3월26일은 샛바람이 많이 불었다. 교무실 난로엔 조개탄이 타고 있었던가.
과수원자리엔 거대한 산내불고기단지가, 장터는 흔적도 없고 유일했던 부식가게자리엔
낯선 건물이 즐비하다.
주말 빈찬통을 들고 기다렸던 정류장도 흔적 없고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대신한다.
새카만 얼굴에 볼이 홀쪽하게 야윈 매표원은 기다리는 우리 앞으로 일일이 와서
표를 끊었다. 당시 우리학교 운영위원장인 무표정한 그의 옆모습이 기억난다. .
지금 생각하면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아래였을텐데 그때는 초로의 시골어른으로 보였다.
당꼬바지에 허름한 재킷 복장으로 정류장에서 표를 끊던 그가 학교행사때 양복 입고
내빈석에 앉은 모습은 아무리 봐도 낯설었다.
운동장 느티나무만이 그대로다. 소풍전날 학교 놀러온 우리반 '진희(남)'를 세발 자전거에
태우고 뒤에서 밀며 신나게 운동장을 몇 바퀴나 돌며 첫소풍의 설렘을 만끽 했다.
교실창가 매미 소리 자지러지면 아이들 데리고 냇가로 야외수업 나갔던 일,
함께 물장난치고 뒹굴며 옷이 흠뻑 젖어 돌아오던길의 작열하는 태양빛이 문득 외로웠다.
넓은 냇가(범곡천) 맑은 물은 동삼 썩은 물이라 했다.
여름밤 자취하던 여선생님들과 동네 아줌마와 함께 목욕하러 가곤 하던 냇물은
수정처럼 맑았다. 울울창창 소나무 숲이 드리워진 냇가에서 빨래하던 그곳은 이제 냇가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다. 2002년에 완공되었다는 '대현못' 때문임을 오늘 알았다.
되돌아오는 길 버스정류장의 '소태'라는 푯말을 보고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에 바로 내려간다.
단발머리 2학년 여자아이,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눈이 빛나던 태순이. 헐렁한 바지에 헝겊으로 된 허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오던, 우락부락한 얼굴은 화가 나면 눈썹이 치켜올라가던
황종목,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늦은봄 집에서 땄다며 진보라색 오디를 한웅큼 내밀던 길쭉한 얼굴이 새카맸던 남자아이 그들은 '소태골'에 산다고 했는데 근무 4년간 그곳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2학년 우리반 그 아이들이 살았던 마을이구나. 오른쪽 언덕엔 분양되지 않은 전원주택이
생경스럽게 자리잡고 있으나 왼쪽엔 옛마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반 아이들이 다닐때도 저 다리가 놓여 있었을까 아니면 냇물을 건너 등교 했을까.
새카맣게 그을은 태순이와 종묵이 얼굴을 떠올리며 소태교 밑에 삼각대를 설치한다.
냇건너 마른억새 실루엣이 아름답지만 거무튀튀한 색으로 흐르는 계곡엔 구부러진
철사, 오물이 박혀있어 오염을 말해준다. 더이상 동삼 썪은 물이 아니다.
마침 돌담길도 있어 빛이 다할때까지 셔터 누른다.
어둠이 깔리자 안노인 몇 분이 밤마실 드셨는지 노인정에 불이 들어온다. .
도회로 나간 자식얘기 손주손녀 얘기 나누실까. 점 10원짜리 고스톱이로 치시는 걸까.
빈 감나무에 걸린 초저녁달이 더욱 외롭다. 안노인 쉐타와 원색 꽃무늬 몸빼이와 내복이
걸린 마당 빨랫줄과 붉은색 고무다라이가 뚜껑으로 덮힌 장독대는 덩달아 쓸쓸하다.
의곡 초등까지 못해도 시오릿길은 족히 되겠다. 문득 학교까지 타박타박 걸어가고 싶다.
아홉살 그 아이들이 그렇게 걸어왔듯이.
그때는 한 번도 아이들 등하교 고충을 헤아리지 못하고 막연하게 먼거리 통학생 정도로만
생각한 것이 새삼 미안하다.
학교사택 뒤에 조그만 못이 있던 것을 떠올리며 큰길 버리고 마을로 드는 작은길 잡는다.
기억의 딱 그곳에 옛모습 그대로 못이 있어 반갑다.
겨울밤 마을에서 함께 자취하던 여선생님들(모두 선배)과 이불속에 다리 묻고 뜨게질 하러
오가던 작은 논길은 걸어보질 못했다.
멀리서 본 선배 자취집 색바랜 스레트지붕과 돌담은 그대로다.
풋풋했던 이십대 초반시절로 다녀온 길,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나 내마음의 보물창고에 고스란히 간직된 그 길은 언제든
꺼내볼 수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삼을 일이다.
다음엔 꿈속에 가끔씩 나타나던 의곡면의 다른 마을 가볼 것이다.
수학여행 돌아오던 6학년 마중하러 나갔던 원두 아카시숲과 방동, 우라, 회평, 외칠, 내칠리 등 정겨운 마을이름을 꺼내본다. 꿈속에 보았던 논두렁길, 마을 동구길이 맞을까.
봄소풍날은 동네 잔치날이었지. 소풍지 마을 어른들 모두 모여 솥걸어 쇠고기국 한솥
끓여 교사들과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던 일, 봄빛 흐드러지면 맑은 강변에서 하던
화전놀이는 교사와 학부형관계가 아닌 풍류 한자락으로 남는다.
먼지 뒤집어쓴 완행버스 털털 거리며 가던길, 먼지에 쌓여 버스 뒷꽁무니만 보이던
산내 신작로길 아련하다.
가슴에 그리움이 출렁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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