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논메우기 공사로 지금 허수아비가 있는 곳은 밭으로 변했습니다.
지금쯤 푸른 모포기들이 남실거리는 풍요로운 유월 들판이 되었을터인데
난데 없이 뉴패션 허수아비가 등장했습니다.
논메우기 공사는 인근 아파트 신축현장에서 쏟아져 나온 흙을 처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량농지와 원활한 물흐름길을 전제로 했는데 업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논농사는
엄두도 못내고 밭농사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우산쓴 허수아비가 있는 곳은 윤씨네서 콩농사를 시작 했습니다.
로타리(경운기로 밭을 일구는 것) 치고 콩을 흩어뿌려 다시 로타리 치니 신기하게도
콩이 올라오더군요. 고랑을 타고 정성껏 심어야 콩이 날줄 알았는데 놀랐어요.
윗쪽은 콩싹이 올라와 허수아비가 필요 없는데 저 곳은 이제 막 콩을 뿌려놓아
비둘기, 까치들이 파먹지 못하도록 저렇게 해놓은 것이지요.
아침운동길 마다 저 밭을 보며 속상해 합니다.
작년 논메우기 작업이 시작될 때 주민을 대표하여 그들
(대부분 소작농-예전엔 자작농이었으나 땅값이 조금 오르자 외지인들에게 팔아넘김.
지주는 대부분 울산 거주자)의 이익을 위해 업자와 타협하여 소작 못하는 한 해
소출을 계산하여 찾아준 사람이 남편 이었습니다.
땅이 꺼져 있어 메우면 보기도 좋을 뿐더러 농사짓기도 수월할 것이라 생각하며 한 해 농사
피해액만 계산하여 협상 했는데 업자는 애초에 논농사 짓든 못짓든 아랑곻 않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흙을 마구잡이로 퍼넣어 논농사는 어림없답니다.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이 윤이 날 정도인 윤씨 아주머니께서는 특유의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논농사는 생각도 못한다는 얘기를 한숨 섞어 얘기하십니다.
동네 대표로 남편이 나서서 지금 민원을 넣어 놓고 지주들도 구청을 상대로
민원을 제기 해놓았답니다.
지주들은 준공 허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그 어떤 권리행사도 할 수 없다네요.
애초에 투기 목적으로 땅을 사들인 터라 그들이 더 급하긴 합니다. 되팔 수 없으니.
사람의 손이 얼마나 위대한지......
피땀흘려 저렇게 밭농사로 바꾸어 고추, 콩을 엄청나게 짓고 있습니다.
그렇게 육신을 아끼지 않은 탓에 지금 고추농사는 검푸르게 잘 되어가고 있지만
고의적으로 약속을 어기며 자신들의 이득만 챙겨 날라버린 업자가 원망스럽습니다.
논도 길보다 높은 곳이 많아 당장 장마에 길이 다 잠겨버려 홍수사태 날까 염려이구요.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얼마나 흙을 많이 퍼다 넣었는지(그것만이 그들의 이익이므로)
동구 입구 논둑은 교도소 담장 같습니다. 볼때 마다 내가 교도소에 갇힌 느낌입니다.
논메우기전 미류나무 소실점처럼 논둑들은 동네쪽으로 가느슥한 소실점을 이루며
낮은 동산과 정답게 어울렸었는데 이제 그곳은 동네 가까운 쪽 일부 제외하곤
보기에도 척박한 찐득이 흙에 잡초만 드문드문 합니다.
흙이 얼마나 독한지 여름 그 극성의 잡초도 무성하지 못합니다.
허리가 휘도록 노동을 고스란히 바친 윤씨네 고추, 콩농사가 풍년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위로로 말씀 드린
"고추농사 잘 되면 벼농사 못지 않을 것입니다. 고추가 좀 잘된 것이 아닌데요."
"그렇지요. 잘만 되면야......"
새카만 얼굴에 흰 이빨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아주머니는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그간의
거친 노동도 잊은듯 희색이 만연합니다.
도저히 풀도 나지 않을 것같은 그 땅에 거름 50포 넣고 로타리 치고 긴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어린고추모종 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흙이 아닌 찐득이 흙덩어리를 들어 보이시며 흙이 아니라 돌덩어리라며 이 땅에서
고추가 뿌리를 내려줄 지 모르겠다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후로 아침 운동길 마다 마치 내가 농사 짓는 듯 고추모종을 걱정 했는데 때맞추어
비가 적당히 내려주어 지금은 검실검실 잘도 자라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가준다면 풍작은 틀림없겠지요.
볕 좋은 가을날,
풍성히 수확한 붉은 윤나는 고추 말리는 윤씨아주머니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길 빌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