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는 우리들 기억 속에 화석처럼 잠들어있는 유년의 고향과 아버지와 소를
되살리는 주술과도 같다. 삶의 내리막길에서 빚어낸 어쩌면 이시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와 아버지의 아름다운 교감과 눈물겨운 헌신을 그리고 싶었다.” - 다큐영화 <워낭소리> 감독 이충렬
워낭이란 마소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여단 방울이다.
턱 아래에 늘어뜨린 쇠고리라고도 하는데 난 방울이라는 이름에 익숙하다.
겨울 유년의 고향, 소는 늘 내곁에 있었으며 빛바랜 물빛저고리와 낡은 호박색 한복조끼의
겨울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마을 윗뜸의 한적을 더욱 적요하게 하던 마굿간 워낭소리와 함께.
오랫동안 내마음의 풍경소리 여운으로 고여있다가 주술처럼 풀린다.
쇠죽간 풍경, 허술한 돌담 뒤쪽에 윗뜸의 몇 가구들이 길어 먹는 뒷샘이 있다.
쇠죽 끓이는 닷말 무쇠솥과 여물 썰어 쌓아 놓는 공간이 맞물려 있고
아궁이와 나란한 지점에 작두가 있다.
작두 밟을 때 힘 쓸 수 있도록 공중에 ㅅㄲ 엮어 만든 손잡이 매달려 있다.
아궁이 오른쪽 길쭉한 공간은 땔감을 쌓아놓는데 끝부분이 쇠죽간 입구가 되는 셈이다.
큰 작두날 아래 가지런히 짚단이 썰어져 나오는 조화가 신기했다.
자칫하면 무시무시한 작두날에 손 베이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아야했는데
작두를 밟는 고모, 삼촌이나 구부정한 등을 보이신 채 짚단을 넣으시는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실수 없으셨다.
넣고 썰고의 반복적인 리듬이 경쾌하기까지 하다.
수북이 쌓여있던 짚단이 바닥나면 반대로 무쇠솥 뒤엔 고봉밥처럼 여물이 쌓여져간다.
리드미컬한 동작이 재미있어 보여 중학생 무렵 또래들과 흉내내본 적 있는데
금방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할 만큼 힘드는 노동이었다.
가끔씩 고모, 삼촌들이 서로 하지 않겠다고 미루던 이유를 알았다.
할아버지께서 한쪽 귀퉁이 찌그러진 아리랑표 성냥곽 뒤져 아궁이에 불지피기 전까지
바깥과 다름없는 쇠죽간은 아주 추웠다.
불빛이 널름대는 각도에 따라 할아버지 얼굴도 여러 색깔로 바뀐다.
그 모습이 숭고하게 보일 때도 있었는데 농가의 재산 일 호인 소에게 먹일 쇠죽 끓이시는
모습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쇠죽솥에 넣는 물은 기명물(그릇 씻은 물)과 쌀뜨물이다.
정짓간(부엌) 앞 연자돌 위에 구정물통에서 길어다 쇠죽솥에 붓는다.
새벽에 끓이는 아침 쇠죽물은 전날 저녁에 반드시 채워놓아야 하며
점심 퍼주고 난 빈 솥엔 저녁쇠죽물을 채워 놓아야하는 것은 묵시적인 약속이었다.
내 몫인 그 일을 위해 초등학생인 난 긴장해야 했는데 제 때에 해놓지 않으면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말이 짐승이지 소는 큰살림 밑천이었기 때문에 쇠죽에 신경을 그렇게 쓰셨던 것이다.
기명물과 쌀뜨물 섞인 물에 고구마 숭숭 썰어넣고 등겨 넣어 푹 끓이다
김이 나면 ‘ㄱ’자 모양의 뒤지개로 아래 위 골고루 섞는다. 그때쯤이면 마굿간에선 워낭소리가 더욱 ‘딸랑딸랑’거리는데
바람이 미는 소리가 아닌 어서 먹을 것을 달라는 신호다.
골고루 섞어가며 퍼내기엔 내 팔이 다 닿지 않을 정도로 큰 솥이라 쇠죽을 퍼내려면
까치발을 들고 허연 김을 저어낸 후 퍼야한다.
뜸을 푹 들인 쇠죽의 구수한 냄새는 겨울 유년의 고향냄새다.
소는 거칠고 험한 노동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겨울 한 철이다.
주인이 때맞추어 끓여주던 쇠죽의 구수한 맛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짧은 기간,
짐승이지만 결코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던 그래서 사람과 소의 교감도 가능했을 것이다.
찬바람이 채 누그러지지 않는 이른 봄부터 쟁기를 지게에 얹고 들판을 나서는
할아버지 손에 ‘이까리’(고삐의 경상도 사투리) 잡힌 소의 울음소리는 고달픈 생의 비애가
서린 듯 서글프게 들린다.
이른 아침에 나가면 땅거미 질 무렵에나 돌아올 수 있는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코에서는 연신 허연 김을 뿜어대며 돌아와 고단한 몸뚱아리 채 풀리기도 전에
들로 향해야하는 제 처지에 울분이 섞인 울음소리일 것이다.
달콤한 아침잠결에 멀어져가던 워낭소리, 소의 복받친 울음을 대신 한다.
뙤약볕 아래 오릿 길 걸어 새참을 내가면 써레질이나 쟁기질 하는 소의
입마개(ㅅㄲ로 둥글게 엮은)사이로 연신 허연 김과 침이 줄줄 흐르지만
일하는 소는 함부로 물을 마실 수도, 풀을 뜯어 먹을 수 없다.
신기한 것은 할아버지와 소의 소통수단이다.
‘이랴, 이랴’ 소리에 앞으로 나아가고 ‘자라, 자라’ 소리에 왼쪽으로, ‘워어, 워어’ 소리엔
어김없이 제 자리에 멈춘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을 때는 이까리만 잠깐 당기면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가 말을 안 들을 때는 ‘즛쯧’ 혀를 차시면서 이까리를 세게 당기거나 채찍을 치면
몇 번 뻗대가도 할아버지께서 원하는 쪽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가만 들어보면 할아버지의 외침엔 강약과 리듬, 반복성이 있어 판소리의 추임새 같다.
약골이신 할아버지의 소몰이 소리는 그리 신명나지 않았으나 다른 논의 젊은 아재들이나
이웃 아저씨들 구성진 소몰이 소리 들판에 울려 퍼지면 어깨춤을 자아내게 하는
한판 가락이 되곤한다.
새참을 드실 동안 입마개도 풀려 노동에서 잠시 놓여난 소는 봇도랑의 물도 마시고
논두렁의 풀도 뜯어 먹을 수 있으니 소도 새참을 먹는 셈이다.
소의 쌍꺼풀 진 큰 눈은 힘든 노동을 호소하는 듯 늘 물기어려 있어
그 눈을 마주 보기 안쓰럽다.
고샅길 울리는 워낭소리는 할아버지 귀가를 알린다.
어둑어둑해서야 쟁기 얹은 지게를 지고 소를 앞세우고 삽작을 들어오시는
할아버지께 달려가 소 이까리 부터 받아 외양간에 맨다.
지게 내려놓기 바쁘게 할아버지는 당신의 고단함은 뒤로 한 채 갈고리 모양의
쇠로 만든 소털 긁개로 잔등이며 머리, 목을 긁어주시면서 소의 고단한 하루를
어루만지신다.
물기 젖은 소의 커다란 눈을 보시며서 너도, 나도 힘든 하루였다면서 위로하셨을 것이다.
"딸랑 딸랑, 주인님도 애 쓰셨어요." 움머"
긴 여운의 소 울음소리와 늘 함께 따라나오던 워낭소리는 애조를 띤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잦아들다가 되살아나오며 연약하게 이어지던 할아버지의
소몰이 소리는 동네에 처음 들어온 경운기라는 기계음 앞에서 울림이 더욱 잦아들다가
종내는 거의 들을 수 없게 된다.
경운기의 괴력은 소의 노동력에 견줄 수 없다. 쟁기, 써레를 끄는 소몰이 대신 양손을 이용해 좌, 우로 이동하고,
멈췄다 출발하는 것부터가 완전 달랐으며 기어장치를 이용해 속도까지 조절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굴려도 지칠 줄 모르는데다 논을 가는 속도도 쟁기질이나 써레질에 비해
몇 곱절 빨랐다. 그것 뿐이랴. 소 대여섯 마리 동원되어야 소요되는 짐을 싣고도
경사진 길을 거뜬히 올라설 수 있으며 곡물에 섞인 먼지와 쭉정이 등을 날려 보내는
풍구의 동력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사람의 교통수단으로까지 활용할 수 있으니
너나없이 농자금을 내어서라도 경운기 구입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때로는 ‘놉’(인부)을 사서 농사 지으시던 차에 논, 밭갈이는 아예 경운기
가진 이웃에게 맡기게 되었다.
가끔 경운기가 들어갈 수 없는 산비탈 밭에서나 가끔씩 할아버지의 소몰이 소리 들을 수
있었지만 곧 희미해져갔고 농가 재산 1호이던 소는 재산증식으로 몇 차례 바뀌다가
고모, 삼촌 하나 둘씩 출가시키면서 외양간은 텅 비게 되었다.
이어진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농촌에서 소는 더 이상 노동력이 될 수 없었다.
어린 소의 코뚜레 뚫는 행사도, 일하기 싫어 풀쩍 뛰는 소 길들이는 장면도 들판이나
고샅을 메우던 이웃의 구성진 소몰이 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으며
난 더 이상 쇠죽물을 갖다 붓지 않아도 되고 쇠죽 퍼다나를 일도 없었다.
고샅길에 번지던 매캐한 기름 냄새와 시동을 걸면 삼이웃이 떠나가는 기계음에
차츰 익숙해질 무렵 읍내 5일장의 우시장 한 귀퉁이에서 소를 내다 판 날 만취해서
삽작을 들어오시던 할아버지 잔영이 스친다.
등 굽은 야윈 할아버지 뒷모습과 빈 외양간을 보면서 물기 젖은 소의 큰 눈망울을 생각하며 쓸쓸해 했다.
쇠죽 퍼주어만 밥을 먹을 수 있는 일에 지겨워하지 않아도,
여름날 산과 들로 새벽부터 소 먹이러 다니지 않아도 되니 편안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큰 방 두레상에서 밥을 먹으면 쇠죽 먹는라 딸랑거리던 그 정겨운 워낭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으니 텅 빈 외양간 바라보는 일이 참으로 허전했다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최노인과 마흔 살 소의 이야기인 <워낭소리>,
소의 수명이 보통 15년이라는데 40살인 소가 최노인을 위한 자가용 구실을 하고
논 밭을 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기계를 쓰면 더 많이 수확하고 편한 것을 알지만 매일 묵묵히 소를 몰고 논으로 나가는
천연기념물 같은 농부 최노인,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불편한 다리를 끌고 산이나 밭덤불로 오른다.
쇠죽 쑬 때도 고구마나 등겨를 듬뿍 넣어 영양에 신경 쓰며 귀가 잘 안 들리지만
소의 워낭소리만은 귀신 같이 듣는 최노인과 소는 30년지기 베스트프렌드이다.
열여 섯 살에 시집와 9남매 키운 이삼순 할머니, 소만 바라보고 챙기는 할아버지에게
소를 팔고 기계로 농사짓자고 끊임없이 불평을 하고 버럭 소리도 치지만 다리 불편한
할아버지을 위하는 일에 헌신적이다.
이름도 없이 최노인과 30년을 동고동락한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 산 소일지도 모르는 소,
할아버지의 자가용이 되어 비오는 시내 활보하여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고
평생을 최노인을 위해 헌신하는 착하고 순한 생명이다.
비오는 날 할아버지 할머니를 태우고 노구로 한 발 한 발 위태롭게 걷던 소가 끄는
수레 모습, 오르막길에서는 다리 불편한 할아버지는 태우고 뒤에서 수레를 밀던 할머니,
소를 부리는 중에도 민들레 등 이로운 풀을 뽑아서 소에게 먹이던 할아버지,
수 년간 그들과 함께 하며 HD 영상이 포착해낸 봉화마을의 아름다운 자연을 건져 올린 것도 감동으로 다가온다 .
2006년 12월 소를 장사 지내주고 팔순 노구를 이끌고 청량사 찾던 노부부,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그에게는 그 소가 사람보다 낫다던 최원균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기억 속에 화석처럼 잠들어있는 유년의 고향과 할아버지를 되살린다.
마지막 소를 팔고 약주를 하시고 오셨던 오일장날 저녁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허전하셨을까.
‘사람은 가끔 마음을 주지만 소는 언제나 전부를 바친다’ 라는 이 영화의 메제시를
다시 생각하며 유년의 고향과 할아버지를 되살려준 감독에게 경의를 표한다.
영화 끝난 후 좁은 통로를 나오며 눈자위가 붉으스름해진 몇 몇 사람들을 본다.
소먹이는 초등학생이던 꼬마에게 이끌려 순하게 따라오며
‘이랴 이랴, 자라 자라, 워어 워어’의 말을 잘 알아듣던 우리집 황소를 떠올리며
동물과 사람과의 교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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