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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른 세상의 달
이름: 서정애


등록일: 2023-04-13 06:30
조회수: 102 / 추천수: 28


빈 의자엔 햇살 한 줌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칠이 벗겨지고 바랜 나뭇결이 세월의 풍상을 말해 준다.
해토머리를 건너온 바람이 다리쉼을 한다. 아버지의 자리에 적막이 쌓여있다.

꽃이 머물다 간 곳엔 자태와 향기가 있고, 빈집엔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란 흔적은 오래 지워지지 않아서 그리움이 배어나는지도 모르겠다.

<중략>

얼마 전까지 무엇이든 달게 드셨다. 맏사위와 술 대작을 좋아했으며 매사에 호방했다.
걸음은 불편했지만 운전으로 팔십 리 길 고향 농장에 거뜬히 다녀왔고 매일 인근 공원에
나들이를 다녔다. 늘그막에 일군 고향 자갈밭에 당신은 감나무 수십 그루를 심었다.
해마다 11월 첫 토요일 칸에 붉은색 동그라미로 ‘감 따기 가족 축제’를 표시해놓곤
자식들을 기다렸다.

아흔한 번 째 생신상의 음식은 통 드시지 못했다. 첨엔 틀니가 시원찮아 그런 줄 알았다.
“너거 아부지 식사 챙기는 게 여간 힘드는 게 아니다.” 전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를 번번이
듣고도 노환일 것이라 대수롭잖게 여겼다.
끝내는 밥 한술 넘기기가 어렵게 되었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대학 병원 응급실을 거쳐 입원한 후,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본 결과 폐암 말기였다.

<중략>

면내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아리따운 엄마와의 결혼,
뒤늦게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차린 오붓한 신접살림,
건강한 사 남매의 탄생, 성장해 저마다 자리 잡은 자식들, 당신 땀으로 일군 농장….
이탈의 위협이 많던 인생 선로에 그런 곧은 길이 없었다면 엄마와 65년 해로까지
닿지 못했으리라.

인디언 세계는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있다고 믿으며 그것들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였다.
체로키 족은 잿빛 풍경으로 서서히 바뀌는 어둠의 달 12월을 ‘다른 세상의 달’이라고 했다.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은 죽거나,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인디언들의 생각은 달랐다.
해와 달은 원을 그리며 떠올랐다가 원래 자리로, 계절도 하나의 고리에서 순환하여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두 달여 만에 몸무게가 이십 킬로그램이나 빠져 환자복이 겉돌았다.
귀를 바짝 대어 네댓 번 정도 듣고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코에 꽂힌 산소 공급 호스가 불편한지 자꾸 잡아 빼는 바람에 간호사들이 진땀을 흘렸다.
조직검사 중 출혈 과다로 급박한 상황이 되자 주치의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다행히 안정을 찾았고 일반 병실로 옮겼지만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이틀 정도면 폐에 찬 물을 빼고 퇴원할 것으로 믿었던 당신은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성화를 냈다. 뜻대로 되지 않자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의료진도, 간병사도, 같은 병실 환자도 모두 힘들어했다.
당장 병원을 나가겠다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다. 우여곡절 끝에 가퇴원했다.
며칠 주기로 폐에 찬 물을 빼러 내원해야 하는 문제를 남겨둔 채.

퇴원하자마자 “당신 나 만나서 고생 많았다. 미안하다.”를 반복하며 울먹였다.
당신 삶의 지난 했던 구비 길을 돌 때마다 중심을 잡아준 것은 엄마였음을
뒤늦게 알았으리라.
그렇게 원했던 당신 방에 누워 혼곤히 잠들다 깨어나길 반복하던 당신은
퇴원 일주일 째 날 아침에 목욕을 원했다.
면도까지 말끔하게 마친 다음 날 새벽, 잠결에 ‘잘 살아라. 잘 지내라’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마침내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이 땅의 크고 작은 것들을 끊임없이 순환시키네 / 이것이 삶의 순환 / 모두를 움직이게 하는 것 / 절망과 희망 속에서도 / 믿음과 사랑 속에서도 /​ 우리의 자리를 찾을 때까지 / 매듭을 풀 수 있을 때까지 / 그 순환 속에서’ 라이온 킹 OST ‘삶의 순환’의 마지막 구절을 읊조려본다.

끝은 소멸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그것이 삶의 순환이 아닐까.
체로키인디언처럼 12월이 또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달이라면 죽음 또한 그럴 것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죽음, 그것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시간이다.
아버지는 저쪽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리라. 봄이 오는 것처럼.

아흔 한 해 아버지의 에필로그를 읽는다. 빈 의자에 기대어 있던 햇살이 설핏해진다.
<하략>

***************************
졸작 <다른 세상의 달>은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쓴 글입니다.
힘겹게 써내려간 한 문장 한 문장은 자식으로서 어찌 해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영면하신지 한 달이 다 되었습니다.
장례 치를 동안 '자식 도리 다 했다고, 여한이 없다.' 했는데 교만이었습니다.
문득문득 생전의 당신 모습과 음성을 떠올리며 뒤늦게 눈물 흘립니다.
유난히 정이 많았던, 따듯한 감성의 아버지를 추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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