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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퀘렌시아
이름: 서정애


등록일: 2020-07-17 10:08
조회수: 21 / 추천수: 2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고 합니다.
투우사와 싸우다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곳에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읍니다.
기운을 회복해 다시 싸우기 위해서죠.
그곳에 있는 동안 소는 더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소만 아는 그자릴 스페인어로 퀘렌시아(Qurencia)라 합니다. 안식처죠.

투우장에 퀘렌시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어디가 자신에게 안전하며 숨을 고를수 있는지 살핍니다.
그곳을 자신의 퀘렌시아로 삼습니다.
투우사는 그곳을 포착.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집니다.
투우를 이해하기 위해 수백번 투우장을 드나든 헤밍웨이는
"소가 퀘렌시아에 있을땐 말할수 없이 강해져 쓰러뜨림이 불가 하다"했습니다.

어제 아침 출근 전에 침목 계단의 무수한 잡초를 뽑았습니다.
강아지풀, 비단풀, 괭이풀, 낮달마꽃 등 장마에 풀들이 무성했습니다.
한결 정갈 해져서 마음이 개운했습니다.
침목 오름길은 우리집 얼굴인데 그간 무심했네요.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무성하게 뻗은 난타나도 베어냈구요. 땀을 흠뻑 흘려 샤워를 하고 출근해야 했어요.
퇴근해서 3시간 동안 뒤란에서 땀을 흘렸습니다.
나보다 1시간 일찍 올라간 그와(정말 보기 드문 상황.) 함께 일 하니 힘이 났습니다.
그저께 심다 남은 팥과 녹두 모종을 죄다 냈습니다.
제주 여행에서 돌아오니 파릇파릇한 모종판을 보고 신기했어요.
생명의 경건함을 느꼈을 정도로...
한 포기라도 허투루 심을 수 없어 정성을 다하여 옮겨 심었습니다.
생전의 울 할머니 일 하시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본 덕분에 이랑을 만들고 북을 두둑히
주며 땀 흘렸습니다.
그가 몇 번을 불렀지만 모종을 다 내기 전까지 내려갈 수 없었어요.
제 일하는 스타일입니다. 일을 아퀴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몸에 무리가 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몸 상한다고 늘 걱정하시는 엄마와 너무 열심히 밭일 하지 말라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제 성정 때문인 듯합니다.
뽑아낸 톱풀은 그가 동쪽 밭머리에 옯겨심었습니다.
파초와 수레국화와 어우러질 톱풀 꽃밭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창조의 기쁨'이 이런 걸까요...제 손끝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꽃밭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줄 모르겠습니다.
개미에 물리고 온 얼굴에 진흙이 튀고 팔이 아프도록 호미를 놀려야 하지만...

5시 40분에 기상하여 30여분간 책을 읽고 다시 뒤란으로 나갔습니다.
엊저녁에 못다 한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서.
장마 후 풀숲이 되어버린 개량달맞이 꽃밭을 매고 어성초와 애플민트로 뒤덮인 길을
되찾았습니다.
기와를 걷어내고 속에 묻힌 어성초를 쪼아내며 정신없이 일에 빠져들었습니다.
잡념이 들어설 바늘만한 틈도 없이 몰입하니 일이 곧 명상입니다.
마무리를 못했 지만 시간을 가늠하며 내려오니 8시.. 출근 준비를 서두릅니다.
팔에 근육 이완제를 바르고 출근해야 하지만 행복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내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곳, 퀘렌시아...
그대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요?

그대, 해피 금욜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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